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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코쿠의 숨은 진주, 마쓰야마 여행기

by choi-yw96 2025. 4. 6.


온천과 문학, 그리고 시간 여행이 흐르는 도시

 

일본을 수없이 여행했지만, 시코쿠는 늘 뒤로 미뤄졌던 지역이었다. 도쿄, 오사카, 교토의 번쩍이는 명소들에 비해 덜 알려졌고, 교통편도 단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불편함’이 오히려 여행의 깊이를 더했다. 이번에 다녀온 에히메현 마쓰야마는, 그런 의미에서 일본 여행의 또 다른 정수를 느낄 수 있는 보석 같은 도시였다. 따뜻한 기후, 아기자기한 골목, 전통과 문학이 살아 숨 쉬는 공간, 그리고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 중 하나 이 모든 요소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마쓰야마만의 매력을 빚어낸다.

 

시코쿠의 숨은 진주, 마쓰야마 여행기
시코쿠의 숨은 진주, 마쓰야마 여행기

도고 온천: 천년의 증기, 치유의 시간


마쓰야마 여행의 출발점은 단연 도고 온천(道後温泉)이다. 무려 3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온천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공중 온천 중 하나로, 많은 예술가와 문학인들이 찾은 장소이기도 하다. 특히, 일본 근대문학의 거장 나쓰메 소세키가 자주 들렀던 것으로 알려져 있어, 그의 소설 『도련님(坊ちゃん)』에도 이 온천의 묘사가 등장한다.

 

도고 온천 본관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고풍스러운 목조건물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영감을 준 장소로도 유명하다. 온천수는 무색·무취이지만 피부에 닿는 느낌이 매우 부드럽고, 목욕 후에도 몸이 오래도록 따뜻함을 유지한다. 이곳에서 전통 유카타를 입고 골목을 산책하다 보면, 문득 자신이 19세기 일본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다.

 

본관 외에도 도고 프린스 호텔, 도고 유노마치 등 주변의 온천 료칸에서는 다양한 스타일의 노천탕과 고급 요리를 즐길 수 있어, 하루쯤 머물며 몸과 마음을 온전히 쉬게 하기 좋은 도시다.

 

하이쿠와 문학의 도시: 시 속에 걸어 들어가는 여행


마쓰야마는 단순한 온천 도시를 넘어 ‘하이쿠의 도시’로도 알려져 있다. ‘하이쿠(俳句)’는 일본 전통 단형시로, 계절과 감정을 단 17음절로 압축하는 문학 장르다. 에도시대부터 이어진 하이쿠의 전통은 이 도시의 일상 곳곳에 녹아 있으며, ‘하이쿠 우체통’이란 독특한 문화로 이어지고 있다.

 

하이쿠 우체통은 마쓰야마 시내 여러 곳에 설치된 작고 귀여운 우체통인데, 관광객이 직접 하이쿠를 써서 투입하면 심사를 거쳐 지역 신문이나 전시 공간에 소개되기도 한다. 일본어를 몰라도 걱정 없다. 영어, 한국어 안내가 잘 되어 있고, 간단한 일본어 시도 지역 주민들이 친절히 도와준다.

 

또한, 마쓰야마 출신의 국민 시인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를 기리는 ‘시키 기념 박물관’에서는 그의 작품 세계와 일본 문학의 흐름을 체험할 수 있다. 이처럼 마쓰야마는 단순히 ‘보고 끝나는’ 여행지가 아니라, ‘직접 참여하고 쓰는 여행지’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마쓰야마성부터 노면전차까지: 천천히 흐르는 도시의 결


일본의 성 중에서도 마쓰야마성은 특별한 매력을 지닌다. 해발 약 130미터의 카스야마(勝山) 정상에 우뚝 선 이 성은 에도시대 초기, 가토 요시아키에 의해 세워졌으며, 21개에 달하는 망루와 성루가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성까지 올라가는 길은 케이블카나 리프트를 이용할 수 있지만, 여유가 있다면 도보 등반을 추천한다. 언덕길을 오르며 만나는 소나무 숲길과 도심 전경이 여행의 피로를 씻어준다.

 

도시 전체가 바쁘지 않다는 점도 마쓰야마의 매력이다. 이곳에서는 아직도 노면전차(路面電車)가 주요 교통수단으로 활약 중이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도심을 가로지르는 전차 안에는 여유로운 표정의 지역 주민과 느긋한 여행객이 섞여 있다. 전차를 타고 마쓰야마 시내를 유유히 흐르다 보면, 어쩌면 가장 일본다운 여행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다.

 

전차로 갈 수 있는 또 하나의 명소는 이시테지(石手寺)다. 이 절은 시코쿠 88개소 순례 코스 중 51번째 사찰로, 유서 깊은 역사와 함께 독특한 동굴 통로, 불교 미술 등이 가득하다. 잠시 정신적으로도 정화되는 시간을 갖고 싶다면 이시테지는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마무리: 느린 일본, 깊은 일본


마쓰야마는 겉보기에 화려한 도시는 아니다. 번쩍이는 빌딩도 없고, 대형 쇼핑몰이나 유명 브랜드가 밀집한 거리도 없다. 그러나 이곳에는 일본 문화의 근간이 된 것들이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있다. 시인의 시선으로, 온천수의 온기로, 철컹거리는 전차의 박자로 여행자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도시.

한 도시가 ‘쉼’과 ‘배움’과 ‘감성’을 동시에 줄 수 있다면, 그곳이 바로 진짜 여행지 아닐까.
2025년 봄, 마쓰야마는 그런 의미에서 내게 가장 따뜻한 일본이었다.